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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두리

울 밑에선 봉선화야~~

by 신나는 삶 2011. 7. 2.

 

오늘 처마 밑에 봉선화(봉숭아)를 보니

하양, 연분홍, 자색, 빨강 ....

형형색색 예쁘기만하다.

 

저걸 바라보며

슬퍼해야 했을 조상님들이 생각이 난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

 

저 꽃잎 따다

손가락에 묶어놓고

밤새 욱신거려 잠 못이루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가슴 아프게 생각이 난다.

우리 할머니는

저승길 밝다하시면서 해마다 물들이셨단다.

 

저 봉숭아는

여리디 여려서

마치 곱디 고운 여인 손 같아

건드리면 때 탈세라 보기만 할 지니라.

 

 






<울밑에선 봉선화>

                 김형준 작사, 홍란파 작곡

울밑에선 봉숭아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영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봉선화 노래는 3‧1독립운동 당시부터 한민족의 노래로 애창되었다.
 
1905년.
100년전이다.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된 날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정확히 표현하자면 을사늑약이라고 해야한다고 말한다.
즉 대등한 국가간의 조약이 아닌, 무력을 앞세워 강제로 체결한 늑약이라는 것.
 
우리 동포들은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이날을 치욕으로 생각했다. 그로부터 '을사년 스럽다'는 말이 나왔고, 지금의 '을시년 스럽다'로 바뀌었다고 한다. 참으로 100여년전에 이 말이 생겨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 자체가이날을 우리 민족이 얼마나 치욕으로 생각했는지 짐작케 한다.
 
 
홍난파.
친일파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찌했던 이 노래는
우리 민족의 처량한 신세를 노래한 듯~~~


<봉선화 꽃의 유래입니다>

 

고려시대 원나라에 의해 고려는 원의 말발굽에 밟혀 속국이 되고

엄청난 양의 조공을 요구합니다

그 중엔 고려의 아리따운 처녀들이 몽골처녀보다 이쁘다는 죄하나로

처녀라는 것 하나만으로 다 공녀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화냥년>이라는 말이 이때 생긴 말입니다

 

공녀로 끌려간 봉이와 선이는  원나라 궁궐에서 가야금을 타는 악사로 일했습니다

이 당시의 국제관례로 대국인 몽고는 소국인 고려의 왕세자를 인질로 잡아서 원나라에 머물게 했습니다

 

인질로 잡혀간 고려의 세자는 많은 공녀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심신을 수련하여 나중에 고려의 왕이 되었을 때

고려를 강한 나라로 만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일 술이며 음악이며 궁녀들이며 그야말로 방탕한 생활로 날을 지새워서

수많은 공녀들의 바램을 무참히 꺽어버리는 행실로 실망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봉이와 선이는

고려왕자님이 본래 타고난 심성이 그러한 분이 아니라는 걸 고려 궁궐에서 악사로 있을 때부터

익히 알고 있는바

이를 안타까이 여겨 날마다 망가지는 왕자님을 보면서 눈물로 지새었습니다

 

그런 어느날이었습니다

몽고왕이 주재한 궁중향연이 열렸습니다

고려왕세자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봉이와 선이의 가야금 연주시간이 왔습니다

 

고려왕자님을 애타게 바라보면서 가야금을 연주합니다

제발제발 성심을 가다듬고 문무를 익히고 수련하시어

나중에 고려로 돌아가시면 훌륭한 군주가 되셔서

우리같은 공녀들을 더 이상 붙들려 오는 일이 없도록

부디부디

그렇게 해주시기를...

애절하고 또 애절한 눈길로 왕자님을 쳐다보면서

가야금 연주는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어느덧 봉이와 선이는 손가락에는 피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둘은 가야금 연주를 멈추지 않습니다

애절하고

또 애절한

나라를 잃고 멀리 타국 미개한 나라에 끌려온 여인의 한을 가야금에 실어서

그 한이 고려왕자의 가슴에 맺히도록

열 손가락은 마디마디 피로 물들어 가지만

두 여인의 가야금 소리는 그칠줄 모릅니다

 

봉이와 선이는 이를 악 물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비록 죽을지언정

왕자님의 심성을 원래 모습대로 돌려 놓기 전에는

가야금 연주를 그치지 않을 것을 눈빛으로 주고 받습니다

 

결국

봉이와 선이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으로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비로소

고려왕자는 이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봉이와 선이가 죽고난 이후

왕자는 그 동안의 자신의 행실을 크게 뉘우치고

오직 고려로 돌아가서 왕이 되었을 때

고려를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노력에만 열중하게 됩니다

 

왕세자가 환국을 하여 왕이 되고

왕은 궁궐의 담벼락 밑에 봉이와 선이의 유골을 묻습니다

다음해 6월

궁궐의 담엔 붉은 꽃이 슬퍼보이는 아름다운 꽃이 피었습니다

왕은 이 꽃의 이름을 봉이와 선이의 이름을 따서 봉선화라 짓습니다

 

그리고 그 두 여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모든 고려의 여인들에게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게 합니다

피로 물든 봉이와 선이의 그 손가락의 애절함을 왕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려의 모든 여인들은 봉이와 선이의 애절함을 같이 느끼면서

해마다 6월이면 언제나 손가락에 물을 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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